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원나라의 베트남 원정 (문단 편집) === 다시 시작되는 전운 === 1285년 다이 비엣 정복에 실패한 후에도, 원의 황제인 쿠빌라이는 여전히 다이 비엣 정벌 계획을 포기하지 못했다. 그의 의지가 반영되었는지 거의 곧바로 재정복에 대한 계획이 계획 되었다. 1285년 8월 21일, [[추밀원(중국)|추밀원]]에서 다이 비엣에 대한 재정복을 제안했고 1286년 2월 중순, 쿠빌라이는 2차 침공 때 참전했던 명장 아리크 콰야에게 다이 비엣에 대한 공격 계획을 세우라고 명했으며 3월 초가 되자 참전 사령관들의 최종 명단이 승인되었다. 3월 중순이 되자, 징병과 동시에 300 여척의 군함을 건조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1286년 6월 경에 남부에 널리 퍼져 있는 한인들의 봉기가 벌어진 탓에 다이 비엣 정복은 미뤄졌다가 결국 1286년 말에야 재개되었다. 원나라 군대의 편성을 보면, 총사령관은 2차 침공 당시 총사령관이었던 토곤이 그대로 이어받았고 부사령관은 이해(李海)가 맡게 되었다. 휘하 제장들을 보면 아이우루이치(奧魯赤), 우마르, 반섭(潘燮), 지엡학메탓(葉黑湄失)[* 베트남어 표기이다.], 이궤순(李櫃順) 등이었고 1286년 11월에 아바키(阿八尺), 알리, 아이로, 장옥(長玉), 유규, 시크투르(昔都二), 장문호(長文虎), 비공신(丕鞏辰), 도대명(陶大明), 쩐 쩡닷(陳 重達), 사우규(謝右閨), 보비성(菩比成) 등이 선정되었는데 대부분 2차 침공 당시에 참전했던 이들이었다. 하지만 원정 준비가 길어지면서 이해는 1286년 6월 18일에 사망했고 그 자리를 이전에 총사령관이었던 토곤이 거두게 되었다. 쿠빌라이는 단단히 마음을 먹었는지 어마어마한 수의 군대를 동원했는데 우선 2차 공격 때 참전했던 군대에 장수들의 수가 나오진 않았으나 제국 남부의 강소성(江蘇省), 강서성(江西省), 호광성(湖廣省)에서 몽골인과 한인 병사를 약 7만명, 항복한 남송군 1천명, 운남의 군대 6천명, 해남(海南) 일대에서 1만 5천명, 그 밖에 광서족(廣西族) 군대를 포함해 9만 2천의 병사를 추가 동원했다.[* 사서에 따라 10만, 50만 등 차이가 있다.] 해군의 경우 이전의 전투보다 병력은 더 적었으나 훨씬 정예로 모았다. 700여척의 신형 함대와 120여 척의 해남의 전함을 수군 대장 우마르에게 맡겼으며 이번에는 확실한 보급선 구축을 목적으로 했는지 우마르와 장문호가 함께 17만 석의 식량을 실은 운송선 100척을 함께 지휘하기로 했다. 우마르와 장문호의 함대는 운송선의 호위 및 항구 점령 임무를 맡아 쩐군의 해전에서의 우위를 무너뜨리는 역할을 할 예정이었다. 진격 날짜가 코앞으로 다가오자, 쿠빌라이는 제장들을 모아놓고 다음과 같은 언급을 했다. >'''"자오치(交趾/교지)[* 자오치, 즉 교지는 예전 중국이 북베트남에 설치한 교주의 중심지로서 흔히 중국에서 베트남을 부르는 말이다.]는 비록 작은 나라이나 결코 우습게 봐서는 안 된다."''' 한편, 다이 비엣에서는 총 동원령이 내려졌다. 이번에도 황제 쩐 인종이 직접 참전해 병사들을 독려하기로 했고 총사령관은 흥도왕(興道王) 쩐 구옥뚜안이 맡았으며 정군과 지방군, 그리고 민병대까지 싹싹 긁어모아 32만의 군사를 모았으며 2차례의 공격으로 원나라에 대한 증오가 깊어졌는지 감옥의 죄수들까지 자진해서 입대해 싸우고자 목소리를 높였다. 이미 2번의 전투 모두를 승리했기 때문에 원나라 군에 대해 경험이 많이 쌓여 았었던 쩐 구옥뚜안은 쩐 인종 앞에서 작전을 수립하며 자신있게 "올해에 적들은 쉽게 무너질 것입니다." 라고 단언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